카페 겸 소극장으로 운영 중인 보성여관의 내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19, 경전선 철로가 고갯마루를 돌아 나오는 지점에 한 채의 목조건물이 다소곳이 서 있다.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검은 기와와 하얀 회벽은 사철 차나무 줄기를 닮은 은은한 녹빛을 머금어, 처음 찾은 이도 왠지 모르게 ‘향’을 떠올리게 한다. 1935년, 일본 상인이 철도 개통의 호황을 노려 세운 이 건물의 이름은 ‘보성여관’. 지역 사람들은 “벌교역 두 번째 전봇대만 지나면 나온다”고 말하곤 했다. 그 짤막한 길 안내에는 근대 교통망과 지역 상권, 그리고 한 세기의 시간이 압축돼 있다.

철길과 바닷바람이 빚은 태동

1930년대 벌교는 전라선과 경전선이 교차하는 교통 요충지였다. 곡물과 소금을 실은 화물열차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 드나들었고, 전국의 행상과 문화인, 관료들이 바닷길과 철길을 따라 모여들었다. 여관은 이 흐름을 받아 안는 ‘집합지’ 역할을 했다. 2층에 달린 테라스는 당시로서는 드문 설계였는데, 먼지 자욱한 역전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문사·지식인들이 호기심에 머물곤 했다고 전한다. 일제의 식민수탈망이 지역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던 시절, 여관은 역설적으로 사람과 정보, 신문과 잡지를 흡수하며 ‘작은 공론장’으로 성장했다.

건축적 하이브리드, 낯설지 않은 이질성

보성여관을 거닐면, 한식 목조건물 특유의 ‘숨쉬는 벽체’ 사이사이에 일본식 정밀 목공이 교차한다. 1층 로비 한복판 기둥에는 가느다란 뒷판이 끼워져 있는데, 갈라진 목재를 꿰매듯 철심으로 묶어 두었다. 기술과 자재가 부족했던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을 결합했던 흔적이다. 이러한 ‘건축적 용인’은 등록문화재 현장심사에서도 주요 보존가치로 평가됐다.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보존하고 있는 숙박동 2층의 일본식 다다미방.

소설과 현실이 포개진 무대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여관을 ‘남도여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남도여관의 실제 모델로 낙점받았던 그때에도 이곳은 여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도여관은 이념 갈등과 계급 충돌이 농축된 공간이다. 허구이면서도 익숙한 그 장면들은 곧 근현대사의 응어리다. 덕분에 여관은 역사·문학·관광이 교차하는 특이한 ‘문화 지층’을 획득했다.

잊힐 뻔한 건물을 살린 사람들

산업화의 무게는 생각보다 빠르게 여관을 스쳐 갔다. 1980년대 벌교역 화물취급 중단, 1990년대 고속도로 개통, 2000년대 역전 재개발 계획이 잇달아 발표되는 동안 보성여관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갔다. 존폐를 걱정해야 할 지도 모르는 보성여관의 사라짐을 막아 세운 것은 국민신탁제도였다. 문화재청은 2008년 보성여관을 매입한 후 문화유산국민신탁에게 관리를 위탁하였고 2012년에 지금의 보성여관이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덜 고치고 오래 살리자”

복원팀은 건물 곳곳을 해체 조사하면서도, 가능한 한 기존 부재(部材)를 유지했다. 전통 한식기와가 아닌 일본식 기와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식민의 흔적’이지만, 그것조차 여관의 삶이기 때문이다. 근대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복원한 그 결실은 2012년 개관식에서 시민의 박수로 응답받았다.

차·예술·기억이 머무는 마을 사랑방

현재 보성여관은 카페와 소극장, 헤리티지 아카이브, 게스트하우스로 구성된다. 이따금 작은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또한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기 때문에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카페를 지나 펼쳐지는 숙박동에서는 90년 묵은 근대문화유산에서의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벌교의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보성여관은 오래된 목조 건물의 고즈넉한 풍경을 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발걸음

보성여관은 이미 ‘지속가능 문화유산’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의 원형을 지키면서도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발생하는 수익금을 통해 유지와 보수를 자립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벌교역과 그 맞은편 벌교 문화거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접근성이 좋다는 것 또한 장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문화재임에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하다. 이처럼 보성여관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까운 문화재’라는 메시지를 차향과 함께 퍼뜨리며 과거의 시간을 미래 세대와 공유하는 따뜻한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역과 함께 가는 길

보성군은 여관을 ‘벌교 꼬막 거리—태백산맥 문학관—대한다원’으로 이어지는 ‘차(茶)·문학’ 관광벨트의 허브로 구상하고 있다. 연간 50만 명 방문, 250억 원 경제효과가 목표다. 하지만 속도를 내면 낼수록 ‘느린 가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차밭처럼, 여관도 천천히 우려낼 때 가장 진한 빛을 낸다.

향과 시간이 건네는 속삭임

해 질 녘, 복도 끝 창호 사이로 바닷바람이 스미면,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도 차 한 잔 빛으로 물든다. 여관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해 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여관이 품은 ‘시간의 향’은 빨리 소비되는 관광상품이 아니라, 오래 머금어야 깊어지는 차처럼 우리 곁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차를 천천히 불린 뒤 첫 모금을 들이켜듯, 우리는 이 공간이 묻는 질문—“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할 것인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그때 보성여관은 다시 한 번,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일 것이다. “나는 당신의 오늘을 역사로 빚고 싶다”고.